[줄거리] 정신병원에서 태어나 자란 모드에게 외삼촌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모드는 사실 꽤 반항적인 기질의 소녀였지만 삼촌의 엄격한 훈육으로 얌전하디얌전한 아가씨로 성장합니다. 학자인 삼촌 곁에서 그의 일을 도와주는 비서가 되지요. 그녀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항시 손에 장갑을 끼는 숙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행해지던 낭독회에 한 청년이 손님으로 참석하고, 삼촌은 그가 모드에게 그림을 가르쳐줄 거라고 말합니다. 책에만 둘러싸여 감정을 죽이며 살아가는 모드에게 변화가 찾아올듯했습니다.
…라고 산뜻하게 시작하지만 이게 여성 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영상화한 거라고 알고 보기 시작한 저는 청년이 잘해봐야 방해물 정도밖에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모드의 상대는 당연히 수잔이겠죠. 수잔은 런던 빈민가 소녀로 어머니가 교수형 당해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다행히도 석스비 부인이 그녀를 친딸처럼 돌봐주었고 수잔은 자라서 핑거스미스(fingersmith=소매치기라는 속어)가 됩니다.
책에 둘러싸여 질식 직전에 다다른 숙녀와 런던빈민가의 소매치기라니. 접점이라고는 없을 두 처녀는 청년, 일명 젠틀맨의 소개로 만나게 됩니다. 정확히는 젠틀맨의 계략으로 말이죠. 결혼을 하면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게 될 모드를 꼬여 결혼하기 위해, 옆에서 바람 좀 잘 넣으라고 수잔을 하녀로 추천했던 겁니다. 과연 젠틀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두둥.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감상]
1, 2부로 나뉘는 구성인데 1부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낮에는 삼촌을 도와 서재에 파묻혀 지내고 밤에는 악몽을 꾸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아가씨, 모드에게 수잔은 끌립니다. 모드 역시 수잔과 지내면서 생기 없는 종이인형에서 활발한 처녀로 변해갑니다. 수잔은 젠틀맨이 모드에게 접근할 때면 죄책감과 뒤섞인 질투 같은 미묘한 감정도 느끼고요. 심지어 둘은 어떤 선을 넘는데, 그 장면이 적당히 에로틱하면서 묘하게 순수하게 느껴져 넋 놓고 봤을 정도입니다. 두 처녀가 서로에게 매료되어 어쩔 줄 모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저는 오글거리는 걸 안 좋아하니 온몸을 뒤틀면서 괴로워했을 텐데 일반 로맨스 영화에서의 느글거림, 뻔한 교태, 허세가 빠져 있었기 때문일까요. 모드의 어설픈 유혹과 둘의 수줍은 입맞춤이 정말 좋았습니다. 모드의 손을 답답하게 감싼 장갑조차 매력적으로 활용됩니다. 수잔이 진주 단추가 달린 장갑을 벗기는 장면이 제대로(?)거든요.
하지만 좋은 건 길게 되지 않는 법. 모드를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 수잔은 죄책감은 느낄지언정 젠틀맨의 계획을 멈추지는 않습니다. <바운드> 같은 전개를 내심 기대하던 저는 '혹시 몰라, 저러다가 수잔이 젠틀맨의 뒤통수를 칠 거야'라고 중얼거렸지만 어라. 이야기가 이상하게 가더니, 모드가 수잔을 배신하더군요! 원래라면 결혼 후 모드를 정신병원에 넣고 돈을 챙기는 거였는데 수잔이 모드가 되어 정신병원으로 끌려갑니다. 그렇게 1부 끝.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어?! 순수한 처녀, 모드가 이럴 수가!! 이전까지 내가 느낀 두근거림은?! 이런 순수한 사랑을 한다면 심장이 충만해질 거라고 부러워한 나는 뭐가 되는 거야! 저는 절규하며 들썩거렸어요. 곧이어 이게 완전한 끝이 아니라 1부 끝이라는 걸 떠올리며 다시 엉덩이를 소파에 붙였지만요.
1부가 로맨스물이었다면 2부는 사건물(?)이더군요. 장르가 바뀌니 1부에서 느꼈던 분노는 혼란 속에 떠내려갔습니다. 묻혀서 어처구니도 좀 떠내려갔습니다. 반전이 너무 일찍 배치된 걸로 보아 반전이 하나가 아닐 거라고 감을 잡기는 했습니다만 이건 좀…. 알고보니 둘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네요. 제대로 하면 책에 파묻혀 살아야 했던 사람이 수잔이고 소매치기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모드였다나요. 뒤늦게 자신이 젠틀맨에게 속았다는 걸 안 모드는 수잔을 배신한 걸 후회합니다. 모드를 속이는 수잔이 미웠던 것 이상으로 수잔을 배신한 모드가 미웠지만 그 부분은 둘이 똑같은 짓을 했으니 넘어간다고 해도, 독하게 마음먹고 배신하고서는 뒤늦게 질질 후회하는 모드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뭐지, 이도 저도 아닌 이 여자는- 싶었어요. 뭐, 모드가 후회해도 돈도 없고 후견인도 없는 여자 혼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범죄사건활극(?)이 되어가는데도 미련 많은 저는 망상했습니다. 모드와 수잔이 서로 모르는 척 짠 걸지도 모른다-며 기대를 했지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수잔은 모드에게 이를 벅벅 갈며 정신병원을 탈출하여 런던의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주친 젠틀맨과 다투게 되고 악인 젠틀맨의 결말은-, 죽음이겠죠? 하지만, 수잔, 모드, 석스비 부인 세 여자가 입을 모아 천하의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젠틀맨은 제가 보기에는 이 영화 내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등뼈 휘도록 사기 치러 뛰어다녔더니 한 푼도 못 챙기고 욕만 얻어먹고 배신당하고 종국에는 칼 맞고 이 세상 뜨니까요. 완전 바보 된 거죠. 이럴 때 쓰는 단어 같습니다. 이제는 유행이 지났나요? 지못미, 젠틀맨.
석스비 부인은 가장 모호한 캐릭터였습니다. 이 드라마가 짜증나는 원인 대부분은 이 여인입니다. 유산과 얽힌 계략의 지휘자였던 그녀는 수잔을 속이고 이용하고 버렸습니다. 고아를 지금까지 키워준 것만 해도 어디냐고요? 모드와 수잔 두 사람이 성인이 되어야 유산을 받을 자격이 갖춰지기도 하고, 수잔을 살려둬야 모드와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속셈이 있었으니 키워준 거잖아요. 그러니 석스비 부인을 어떻게 믿어요. 모드에게 잘해줘도 모든 게 거짓 같아서 보는 내내 긴장했습니다. 모드가 다시 뒤통수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잔까지 돌아오니 제대로 본색을 드러내겠군 싶었는데 어라. 석스비 부인이 수잔을 사랑한다네요. 수잔를 배신했으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배신을 아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모드를 이용하려 했으면서 자신은 모드 역시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외칩니다. 젠틀맨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죽였다고 뒤집어쓰면서 수잔과 모드를 구합니다. 뭐죠, 이 사람. 악인입니까, 선인입니까. 결자해지가 이런 것? 어설픈 최종 보스, 석스비 부인이 사형당한 후 남은 것은 허무함뿐. 으음. 남아있던 어처구니마저 소멸됐습니다.
길기도 긴 이걸 왜 봤을까 회의할 때쯤 러브라인이 되살아나더군요. 그렇게 이를 벅벅 갈더니만 수잔은 어째서 그리 쉽게 모드를 용서해주나요. 납득도 되지 않았고 이미 내 마음속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순수함을 잃어 둘의 마지막 키스 장면에서도 무덤덤했습니다. 수잔이 모드를 만나러 저택에 찾아가는 장면은 <제인 에어> 생각도 나서 피식 웃었습니다. 두 사람이 했던 사랑이 거짓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부나 자유보다 하찮았던 건 사실입니다. 둘 다 배신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다시 이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지금은 주변에 젠틀맨이나 석스비 부인 같은 모략꾼도 없으니 깨진 믿음을 추스를 수 있는 듯 보입니다만, 이제 유산도 받을 테니 주변에 사람들도 꼬일 거고, 돈 챙기고 나면 각자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해피엔딩인 것 같으면서 묘하게 찝찝했습니다. 딱 1부까지만 좋았습니다. 문득 원작이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미 질린 거 아니냐고요? 글쎄요. 원작은 이렇게 허무하고 황당스럽지 않을 것 같아서요.